[펌글] <칼럼>필리핀에서는 거지도 웃는다(2-2)
필리핀에는 정부군에 대항하는 2만 명 이상의 무장 반군이 존재하고, 종교적 갈등도 여전하다. 이는 앞으로도 정치적 안정은 요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필리핀에서는 소수 명문집안이 재산을 독차지하고 있어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친족·혈연관계로 엮인 150여 권문세가에서 의회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정치를 주무른다. 두 번의 피플파워를 통해 민주선진화 기틀을 다져놓고도 가문의 세력화라든가, 공직사회에 만연된 부패 때문에 진정한 민주사회는 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1986년 마르코스 21년 독재를 끝낸 필리핀의 민주화 운동인 ‘피플파워’는 1987년 한국의 6월 민주화운동(대통령 직선)에 영향까지 미쳤는데 말이다. 두 나라 모두 오랜 외세의 지배로부터 독립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닮은꼴이다.
하지만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소리만 요란할 뿐 귀족 가문끼리의 나눠먹기식 정치는 중단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패한 나라는 어디나 그렇겠지만, 필리핀은 소수의 권력자가 부정하게 축재한 재물로 국가 재산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계문제가 더 시급한 실정이니 미래를 위한 자신의 투자라든가, 자식의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재생산』에서 불평등의 재생산을 이야기했듯 필리핀에서는 가난한 이들의 앞날은 영원히 불투명해 보인다.
필리핀의 성공한 민주화 운동마저 정치 가문의 교체에 불과했으니 진정한 국민의 민주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이는 필리핀 사람들이 앞으로도 더 오래도록 가난에 시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필리핀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2계급 사회라는 말까지 등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 부패라는 구조적 문제 외에도 부양가족이 많은 것도 필리핀 사람들을 지속적인 가난에 옭아맨다. 필리핀 사람들은 성에 대해 일찍 눈을 뜨고, 이성의 만남이 자유로운 편이며, 피임을 꺼리는 풍습, 가톨릭 국교의 교리에 따라 법적으로 금지된 낙태 등의 요인으로 자녀가 많다. 국가에서는 1970년대부터 가족계획을 시행하지만 큰 효과는 없다. 결국, 일자리보다 부양가족이 턱없이 많아 가난한 집안은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다.
생계에 곤궁함을 느낀 시골지역에서는 수도 마닐라로 모여든다. 마땅히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은 구걸로 생활을 시작한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평일에도 어린아이들이 구걸에 나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날의 생계를 보탠다.
자연 아이들은 손쉬운 구걸을 선택했으며, 시골에서 갓 올라와 먹고 살기 어려운 가족들은 마닐라 시내 곳곳의 길거리를 보금자리로 택해 살아간다. 1년 내내 따뜻한 기후가 그들을 길거리 생활로 가능하게 했다.
필리핀에 거지가 많은 것은 가난의 악순환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거지들이 많다는 것은 이들에게 동정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기도 하다. 외국인에게도 손을 벌리지만, 내국인에게서 얻는 것이 더 많다. 그것이 가능한 것도 필리핀 사람들에게 인정이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사람들의 인정은 대가족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역시 1960년대 이전만 해도 집성촌이 있었고, 사촌이 한집에서 살거나 이웃하는 대가족제였다. 필리핀은 지금도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아가다 보니 사촌, 팔촌까지의 혈연관계가 끈끈하다. 시골은 마을 전체가 씨족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닐라로 이주하고서도 친인척들이 모여서 살아간다. 가구당 평균 가족이 8명이라는 통계가 있을 만큼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마닐라에서는 걸어가는 길목마다 거지들이 몰려와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오래도록 필리핀에 살면서도 이 거지들에 대해 적응이 되지 않는다며 진절머리를 치는 사람들도 많다. 필리핀을 다녀온 여행객들이 필리핀을 거지들의 천국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필리핀은 거지의 천국이 아니라 행복한 거지들의 천국이라고 해야 옳다.
필리핀 거지들을 주의 깊게 보면 다른 나라의 거지들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필리핀의 거지는 일반 부자들과 평등하게 살아간다는 점이다. 한국의 서울 거지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필리핀 거지들은 고급 호텔 벽을 의지하여 이불을 깔고 누워 자기도 하고, 대형 상점 앞길에서 가족이 노상 생활을 하기도 한다. 한국이라면 호텔이나 대형 상점 수위가 멀찌감치 쫓아냈을 일이다. 필리핀 거지는 적어도 거리에서만큼은 일반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은 셈이다. 이에 대한 필리핀 여행 기록을 보자.
“한국에서는 잘사는 사람 집 앞에 다 허물어져 가는 구질구질한 집이 있으면 못 밀어내서 안달할 텐데 필리핀은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서로 큰 소리도 안 내고 못 잡아먹어 안달하지도 않고, 그런 면에서 필리핀은 굉장히 인간적인 나라다.”(허미선,『2535를 위한 여유만만 필리핀』, 웅진씽크빅, 2005, pp.190∼191.)
필리핀의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도 나름대로 평등한 삶을 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국에서는 돈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강제로 철거한다. 정부 역시 도시계획이란 핑계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터를 밀어내는 강제 철거에 법을 내세워 도와준다.
2009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용산철거민 사태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잘 사는 사람들의 빌딩이나 빌라 옆에 거지들이나, 포장으로 둘러친 거지의 집이 들어선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으리으리한 빌딩이나 고급 호텔 옆에 이불을 갖다놓고 주거지를 마련한 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호텔 종업원들은 인상도 찌푸리지 않고 거지들과 일상적인 대화까지 나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필리핀 사람들이 지닌 인정의 미덕과 인간 존중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선 제일 밑바닥 인생인 거지들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더러운 손을 내밀며 한 푼을 구걸하는 이들에게 험한 말을 내뱉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면만 깎이는 짓이다. 이럴 때 필리핀식 표현은 ‘파타와린 포(Patawarin po)’, 직역하면 ‘선생님 드릴 게 없는 저를 용서해주세요(Forgive me, sir)’이다.
걸인에게 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뜻을 ‘po'와 함께 정중히 말한다. 예의 바른 말투는 필리핀에서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상식이다.”(알프레도 로체스·그레이스 로체스 지음, 이은주 옮김,『필리핀』,휘슬러,2005, pp.26∼27)
필리핀어인 따갈로그에서 ‘Po'는 우리 말의 존대형 어미인 ‘요’에 해당한다. 거지에게도 그렇게 정중한 언어를 쓰는 필리핀인들이다. ‘저리 꺼져’라고 막말을 하거나, ‘어머야’, 혹은 ‘뭐야’하고 소리를 꽥 질러대는 한국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다음은 어느 글에 등장하는 필리핀 원숭이에 대한 전설이다.
<옛날 어느 왕국에 백성을 잔학하고 거칠게 다스리는 왕과 성격이 고약해서 백성의 원성을 사는 왕비가 있었다. 그들은 매우 부유해서 궁전은 값비싼 가구로 가득 차 있었으며 창고는 진귀한 음식과 술 등으로 넘쳐났다.
어느 날 왕과 왕비는 아침부터 궁전의 정원에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과 왕이 잡담을 나누며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 갑자기 허름하고 등이 굽은 거지 노파가 나타났다. 불쌍한 거지 노파가 이 탁자 저 탁자를 옮겨 다니며 음식을 구걸할 때마다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거지 노파를 쫓아냈다.
마침내 거지 노파는 왕이 앉아 있는 탁자에까지 다가와서 음식을 구걸했다. “제발 자비를 베푸셔서 제게 먹을 것 좀 나누어 주세요. 저는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왕의 옆에 앉아 있던 왕비는 “저리 꺼져. 이 파티는 고귀한 사람들을 위한 파티지, 너 같은 거지를 위한 게 아니야.”라고 고함을 쳤다. 왕비의 말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은 목이 터지라 웃었으며 저마다 숟가락을 들어 불쌍한 노파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내려와 그 거지 노파를 감싸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잠시 후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 여인의 눈에서는 강렬한 빛이 나와 그녀의 얼굴을 눈부시게 밝혀 주었다.
그 여인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 모두는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람을 닮고 사람같이 행동하는 짐승으로 만들어 주겠다.”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지 노파를 때리기 위해 썼던 숟가락들이 공중을 날아 일제히 그들의 엉덩이에 달라붙고 그들은 모두 팔이 긴 털북숭이 짐승으로 변했다.
짐승으로 변한 그들은 말을 하려 하였지만 낼 수 있는 소리는 단지 ‘쿠라!’였다. 짐승으로 변하자 그들은 추한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모두 산속에 숨어 살았다. 그들이 바로 필리핀 원숭이의 조상이다.>
이 전설은 거지를 대하는 필리핀 사람의 심성을 반영하고 있다. 필리핀 사람이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낙천적이어서만이 아니라, 돈 없어도 인간 대접을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인간미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필리핀 사람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정연수 논설위원(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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